2023년 개인 회고
기록할만한 일들
숙원이었던 대학 졸업을 드디어 했습니다. 햇수로 8년을 다녔는데요. 섭섭함보다는 주로 시원했습니다. 더이상 어떤 학교에도 소속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2년을 했던 기술 세션 모임인 주간기술동향이 망했습니다. 다들 직장인이 되어서 주말 아침에 시간 빼기가 아주 어려워진게 큽니다. 대학생 말엽에 성장에 목매던 우리 꼬마 IT업계 종사자들은 이제 타성에 젖은 직장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좋은 것 같습니다.
3년간 혼자 운영하던 외대종강시계 프로젝트를 정리했습니다. 운영에 시간을 더 못쓰겠다는 점도 있었지만 대학을 떠나면서 프로젝트를 계속 이어나갈 동기가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직장에서 생긴 자신감이 마음을 많이 안정시켰습니다. 불안과 조바심이 많이 줄어서 나를 나답게 하는 것에 대해 오랜만에 깊게 고민해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년만에 개발 공부로 스스로를 채찍질하기보다 좋아하는 텍스트들을 읽고 글을 쓰는데 열심히었습니다.
주로 혼자 놀았습니다. 혼자 놀기 달인이 되어갔습니다. 인간관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연락해서 본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려고 하는 주도적인 시도를 처음 해봤습니다.
올해의 이모저모
느낌
다른 사람 없이는 살지 못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올해 직장에서 해낸 거의 모든 일도 동료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습니다. 올해 저와 함께했던 분들이 저에게 준 도움이나 영감, 타인이 쓴글과 같은 저작물들에서 비롯되는 감정들 중 잃고 싶지 않았던 것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타인이 없으면 많은 것을 이루지도, 느낄수도 없겠다는 깨달음에 왔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관계가 끊어지고 다시 만들어지고 하는 와중에 큰 타격을 못 느끼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는데요.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고 그동안 쿨병에 걸려있었던게 맞습니다.
나랑 화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느낍니다. 저는 자기혐오 천재입니다. 개발을 시작한 것도 일종의 나다움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사실 개발로 먹고 살게 된 이후에 도 저는 제 모습에서 싫은 부분,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지 못할 것 같았던 부분들을 많이 죽여왔습니다.
"내 있는 그대로를 많이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아니었고, 지금 이 모습이 되기 위해 나만이 가지고 있던 것들을 꽤나 없애며 살아왔다. 없어진 내 일부들은 몸에서 잘려나간 손이나 발처럼 알고 사는 것이 좋겠다." - 2022년 9월 12일에 남긴 글
문득 제가 죽인 면면들을 애도해야겠다. 잃은 것으로 받아들여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던게 작년이었는데, 올해는 이러한 면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는 듯 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죽은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작년과 올해 나름 힘들어하는 와중에 제 솔직한 모습들이 튀어나왔었는데 별 일 없었어요. 사장시켜버렸던 모습으로 서있어도 조금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사에 많이 기대하고 많이 슬퍼하고 많이 기뻐하는 모습, 억지 T가 아닌 F로 사는 모습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덜 가리게 되면서 나와 타인에게 조금 더 솔직해졌다는 생각도 듭니다. 말하고 행하는 것이 더 가뿐해진 기분이 듭니다.
제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를 넓히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것만이 삶의 목적처럼 느껴집니다. 새로운 것, 그것을 만든 사람, 그 속에 서린 마음과 의도를 이해하하면서 생각을 틀고 일상에 균열을 내는 순간들이 몹시 반짝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런 순간 하나 하나를 잘 그러모아 계속 되새기는 것,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더 다가가는 것이 제 딴에는 행복하게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때로는 그 과정이 너무 어렵다고 해도 이해를 포기하면서 뻔뻔하게 냉소하고 싶지 않아요.
학습
올해 초부터는 오랜만에 주식을 다시 매매하기 시작했습니다. finviz도 결제하고 책도 읽고, 리포트나 공시를 찾아보면서 여러 지식들을 쌓을 수 있었는데요. 주식뿐 아니라 증권시장에서 거래할 수 있는 여러 자산군과 포트폴리오 구성 방식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공부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주식 투자에 시간을 많이 쓸 수 없는 본업이 너무 바쁜 사람으로써, 앞으로 투자를 어떤 방식으로 지속 가능하게 할지에 대한 판단이 조금 섰다는 것이 가장 큰 성과입니다.
블로그에 올린 개발과 상관없는 뻘글들을 구상하는데 시간을 썼습니다. 퍽 즐거운 과정이었습니다. 길 가다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메모를 하기도 하고, 자기 전 아이폰 메모장에서 글을 다듬기도 하면서요. 저에게 이런 모습이란 글로 먹고 살아야지 생각했던 시기에서 비롯된 것이라 익숙하면서, 한참 과거의 것이라 낯설었습니다. 다신 만날 일 없으리라 싶었던 제 모습을 만난 것 같기도 했고요. 생산하는 문장들이 요즘 좋다고 생각한 것들과 어느 정도의 거리가 있는지 가늠해보았습니다.
내년에는 재무관리와 관련된 공부를 더 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영어로 읽고 쓰는 것을 전공했지만 요즘에는 또 감 떨어져서 잘 못하는데, 다시 영어로 읽고 쓰는 것을 연습해보려고 합니다. 블로그에 있는 여러 글도 국제화해보고 싶어요.
운동
매주 3분할 근력운동을 3~4회 했습니다. 그리고 목표인 600에는 살짝 못 미쳤지만 560km를 뛰었습니다. 10km 달리기 최고기록은 km당 4분 38초 페이스로, 46분 24초를 찍었습니다. 그리고 회사 동료들과 배드민턴을 치러 다녔습니다. 몸무게는 거의 그대로인데 체지방이 많이 빠졌고 근골격량이 2kg 정도 늘었습니다. 집에 풀업바와 무게조절 덤벨을 들이고 러닝과 배드민턴 장비와 신발도 구비했습니다.
인생에서 운동을 가장 많이했던 한 해였던 것 같습니다. 무언가 몸적인 목표가 있었다기보다는 저는 운동 정신론자라 정신건강을 위해서 하는 겁니다. 불확실성과 복잡성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니 정신이 어지러워지기 딱 좋거든요. 올해 일을 많이 하면서 체력과 건강 문제에 부닥치지 않았던 것도 운동 덕일 겁니다.
내년에는 600km이상을 뛰고, 10km 마라톤을 나가고, 풀업 15개를 정자세로 해내고, 혼자보다는 여럿이서 같이 운동을 하고 싶습니다. 체질량 지수와 관련된 목표는 정하기 싫은데 운동을 저렇게 하면서 먹는것까지 줄이면 너무 괴로워져서 운동 정신론을 실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독서
개발을 시작하고 나서 거의 읽지 않았던 부류의 책들을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요새 "사람들이 왜 저러는걸까"라는 식의 생각을 많이 하게 되어서요. 사람의 행위를 이해해보고자 중독, 신경계를 다룬 뇌과학 책들을 읽었습니다. 사람의 과거를 이해하고자 나치의 독일 제 3제국을 다룬 역사책을 읽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문학과 산문 위주로 읽었습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을 스무살 때 읽었었는데, 나이가 들고 다시 보니 또 새롭게 읽히는게 있어서 좋았어요. 목정원의 산문에서도 위안을 많이 받았습니다.
올해 읽은 책들 : 구글 엔지니어는 이렇게 일한다 / 당신의 뇌는 최적화를 원한다 / 도메인 주도 설계 핵심 /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 도파미네이션 / 레이 달리오의 금융위기 템플릿 파트 1 / 리프트오프 / 모국어는 차리리 침묵 / 모던 웹을 위한 마이크로 프론트엔드 / 브라질에 비가 내리면 스타벅스 주식을 사라 / 살 때, 팔 때, 벌 때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 소프트웨어 아키텍처 101 / 실용주의 프로그래머 / 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 / 인피니트 게임 /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 것 / 제 3 제국사(1) / 제 3 제국사(2) / 주식 투자 최적의 타이밍을 잡는 법 / 타인에 대한 연민 / 패배의 신호
소비
작년 말 이사했던 집을 채우느라 돈을 꽤 썼습니다. 대학가에서 지금 사는 집으로 오면서 사라진 다수의 옵션들 때문입니다. 또 기존에 쓰는 물건들을 더 좋은 것으로 바꾸는 데 돈을 많이 썼습니다. 대학생 때와 비교했을 때 소득이 좀 더 많아지면서 삶의 질이 한 단계 위로 뛰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만큼 씀씀이도 한 단계 올라갔다는게 함정이지만요.
만족감이 높았던 소비로는 LG 휘센 제습기, WebOS가 내장된 LG 모니터, 아이폰 14, 일광전구의 조명들 정도가 생각이 나네요. 하지만 뼈아픈 소비 실패가 꽤 있어서 온라인 구매에 환멸이 나기도 했습니다. 특히 옷. 실물이랑 같기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근데 나가서 사는건 너무 귀찮아요.
내년에는 소비 실패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들이고 싶습니다. 귀찮음을 뚫고 오프라인 구매를 한다던가... 그리고 좀 더 계획적인 소비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발견
둘이나 여럿으로만 갔던 장소에 혼자 가보며 또 다른 재미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혼자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서 전자음악을 들으며 상설 전시장을 천천히 돌아다녀봤는데 너무 좋았습니다. 수막새 보면서 듣는 딥하우스 폼미쳐따
최근에 (목정원의 글을 읽고) 혼자 연극을 2개나 보러 갔는데 그것도 너무 좋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편한지, 극에 동의하는지 같은 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의 감상을 가지고 집에 돌아오는 일이 산뜻했습니다. 근데 한남동은, 명동은 너무 멀어요. 왜 강북에 살았을때 이런 곳을 자주 오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그때는 돈이 없었네요.
내년 목표
- 새로운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기. 만날 수 있는 기회 엿보거나 만들기
- 영어로 쓰고 읽고 말하는 공부를 시간 내서 하기
- 소비 실패를 줄이고 올해보다 더 많 이 저축하기
올해 주관 어워드
올해 좋았던 것들입니다.
- 올해의 앨범: 유라, <꽤 많은 수의 촉수 돌기>
- 올해의 덕통사고: 선미
- 올해의 걸그룹: 르세라핌
- 올해의 발견: Magdalena Bay
- 올해의 유튜브 채널: 셜록현준
- 올해의 유튜브 영상: 백예린 미국투어 직캠
- 올해의 구독: Chat GPT
- 올해의 장소: 위례 중앙광장
- 올해의 신발: 호카 본디 8
- 올해의 러닝 장소: 서울숲 앞 한강변
- 올해의 향수: 에르메스 떼르 데르메스 퓨어퍼퓸
- 올해의 바디워시: 러쉬 올리브 브랜치
- 올해의 술: 아벨라워 아부나흐 배치 69
- 올해의 책: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 것
- 올해의 지적 허영: 실존주의
- 올해의 가심비: LG 휘센 듀얼컨버터 제습기
- 올해의 가성비: 5000원짜리 러닝 벨트
- 올해의 감성비: 후지논 XF 27mm F2.8
- 올해의 버림: 5년 5개월간 사용한 아이폰 8
- 올해의 식량: 피코크 훈제오리
- 올해의 음료: 라인바싸 탄산수
- 올해의 과자: 롯데샌드 파인애플맛
- 올해의 근력운동: 딥스
- 올해의 주목할만한 고민: 강북이 너무 멀다
하고싶은 말
- (오랜만에 만난 분들에게) 오래간만에 연락을 드렸어도 어제 보았던 것처럼 맞아주셨습니다. 자격도 없는 환대를 받는 기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더 자주 뵈어요.
- (자주 만난 분들에게) 저 데리고 놀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재미있어지겠습니다. 개발이나 회사 이야기 더욱 덜 할 것입니다.
- (올해 결혼한 분들에게) 올해 결혼식을 많이 갔는데 환하고 몽글몽글하고 예뻤던 장면 장면들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초대해주셔서 영광이고 모두 다 오래오래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레드벨벳에게) 컴백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