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내 가족과 이웃의 5.18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해 듣고 읽고 아는 이야기들을 상기하며
2025년 05월 19일 /
#thought

어머니와 형제들은 집 안으로 총알이 들어올까봐 두꺼운 겨울 이불을 덮고 장롱 속에 숨었다. 장롱 속에는 외할아버지가 얻어온 뱀술이 있어서 어머니는 눈을 마주칠까 꼭 눈을 감았다고 했다. 외할아버지는 퇴근길에 도청 광장에 쌓인 시신들을, 아버지는 임동에서 몽둥이로 사람을 때리는 계엄군을 봤다.

내가 고등학교 다녔던 동네에 살았던 형의 큰아버지는 머리 옆으로 총알이 훑고 지나가서 그 쪽으로 머리카락이 더는 자라지 않으신다 했다. 중학교 땐 할아버지가 계엄군의 대검에 찔려 돌아가신 친구도 있었다. 동네에 쩌렁쩌렁 울리던, "폭도들이 소탕되었으니 광주 시민 여러분들은 안심하라"는 방송을 기억하던 선생님도 있었다.

나는 1980년 5월 광주를 겪은 사람들의 자식이다. 겪지 못한 나에게 5.18을 상기시키는 것은 이런 들은 이야기들이다. 그 당시 광주에 살았던 어른들 사이를 조금만 건너가면 너무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몇 십 만명이 하나의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는 목격자라는 사실은 비극적이고 각별하다. 서울에 올라와 대학교에서 고향이 제주도인 다른 학과 형을 만났다. 제주도에서 지내시는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4.3 사건에 대해 어떤 상처를 지니고 계신지 설명해줬다. 나는 광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제주도가 고향인 사람을 처음 보았지만,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이해하고 연대했다.

올해 초에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다시 읽었다. 이 책은 보는 내내 너무 괴로워서 도저히 속도를 내어 읽을 수가 없다. 책을 읽을 때마다 나는 내게 이야기를 전한 분들이 그때 돌아가셨을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한다. 총알은 문지방을 넘어 들어왔고 사람들은 길을 걷다 진압봉에 맞았다.

박기현(14세, 동성중 3학년)은 오후 늦게 책을 사러 계림동 동문다리 부근까지 자전거로 나왔다가 공수대원에게 붙잡혀 진압봉으로 두들겨 맞았다.

통합병원 근처에서 구멍가게를 하면 최복덕(여, 61세)은 거실로 들어가다 총알이 날아와 얼굴에 부상을 입었다. 총알은 거실 유리창은 물론이고 장롱까지 뚫고 이불에 수없이 박혔다.

5월 18일의 주요 진압 수단은 진압봉이었지만 19일부터는 대검 사용률이 늘어 시위자가 중상을 입을 확률이 늘었다. 대검으로 시민들을 찌르는 군인들에 대한 증언이 몹시 충격적이라 거듭하여 읽어도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병원에 옮겨져서 죽어가는 사람도 많았다. 학생, 청년뿐만 아니라 노인, 부녀자, 중학생, 심지어는 어린이의 시체도 보았는데, 광주 시내 병원 시설들은 이를 모두를 수용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19일 공수부대의 진압은 18일에 비해 더욱 잔혹했다. 18일처럼 '진압봉'을 주무기로 사용했지만 '대검' 사용이 훨씬 늘었다. 전날 7 공수여단의 무자비한 진압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저항이 오히려 격렬해지자 11 공수여단이 투팁되면서 진압의 강도를 더욱 높인 결과이다.

그럼에도, 총을 맞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금남로에 뛰어든 사람들을 보고 연달아 뛰어든 사람들이 있었다.

잠시 사격이 멈췄다. 그 순간을 틈타 몇명의 청년이 쏜살같이 도로에 뛰어나와 쓰러져 있는 시신과 꿈틀거리는 부상자들을 끄집어냈다. 그러자 더욱 놀라운 일이 이어졌다. 다른 청년들이 다시 태극기를 들고 금남로 한가운데로 뛰쳐나와 구호를 외쳤다. 또 총성이 울렸다. 그 청년들도 공중에 피를 뿌리며 금남로 한가운데서 맥없이 쓰러졌다. 또 사람들이 부상자와 시신을 들어냈다. 그러자 다시 몇몇이 태극기를 흔들며 금남로로 뛰어들었다. 총알은 여지없이 날아와 그들을 쓰러뜨렸다. 이렇게 하기를 대여섯번. 정말로 충격적인 광경이 반복되고 있었다

주위에서 억울하게 죽거나 다친 사람을 보고 엉엉 울다가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대생 김종배(26세)는 21일 도청 앞 시위 대열에 섞여 있었다. 그는 여고생 한명이 위에는 교복을, 아래는 흰 체육복을 입고 지나가다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것을 목격하였다. 총성이 멈추고 한참 지난 뒤에야 쓰러진 여학생을 홍안과로 데려가 살펴보니 이미 숨진 후 였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솟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천진한 소녀가 그의 눈앞에서 바람에 지는 꽃잎처럼 붉은 피로 물든 채 쓰러져갔다. 그는 그날 오후부터 두려움을 떨쳐내고 시위대에 적극 동참하였다.

도청에 안치된 시신들의 맨발에 하얀 양말을 신겨준 사람도 있었다.

도청에 안치되어 있는 사망자를 확인하려는 사람들에게 한사람씩 신분증을 대조한 후 시신을 보여줬다. 대부분의 시신은 형상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돼 있었다. ... 젊은 여자 한명이 하얀 양말 수십켤레를 가지고 와서 시신의 맨발에다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신겨주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계엄군들은 시민들을 죽이고 시신을 여러 장소에 묻었는데, 묻힌 장소를 수소문해서 시신을 수습했던 공무원도 있었다.

광주시청 사회과 직원 조성감은 자신의 담당업무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시신 수습에 나섰다. 5월 27일부터 6월 하순까지 약 한달 동안 광주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41구의 시신을 직접 수습했다. 처음에는 동사무소나 주민들의 제보에 따라 시신을 찾아왔고, 나중에는 시체가 묻혀 있을 만한 곳을 직접 수소문해서 찾아다녔다.

광주 봉쇄와 언론 통제로 인해 이야기들을 전하지 못한 언론인들은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절필했다.

20일 전남매일신문사 기자들은 단체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사직서는 간결했지만 기자들의 곤혹스러운 심정과 항변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줄도 쓰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나는 올해도 여전히 5.18을 겪은 사람들의 자식이다. 그들이 전한 이야기들은 현재에도 뚜렷이 존재하는, 누군가의 아픔과 누군가를 향하는 폭력을 바라보게 했다. 그들이 전한 이야기들은 아득바득 생각해내고 기억해내는 나를 발명했다. 이 이야기들은 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깨닫는다. 매년 좀 더 알아가고 싶다.


Written by 김맥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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