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문제와 싸움 자세
오늘의 체력을 잃고 나는 쓰네. 직장에서 풀어야 할 문제들에 시달리다 뚝배기를 움켜쥔 채 퇴근한다. 답 없어보이는 문제들 이 개같은 문제들과 나는 나란히 현관에 들어온다. 자주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지난 봄에 주도했었던 대형 웹앱의 아키텍처를 갈아 끼우는 작업을 했을 때 집에 들어와도 코드 에디터 잔상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하나 바꾸면 문제가 사방에서 터 졌고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풀다가 풀다가 못 풀어서 고도의 찝찝함을 안고 퇴근했다. 집에 와서는 좀 널부러져 있다가 일을 다시 시작한 경우도 있었다. 복잡한 생각은 끊기지 않았다.
지속되는 복잡함은 생활을 박살냈다. 아침에 깨지를 못하고 주말엔 기절해있었고 습관적으로 초코 묻은 과자를 먹어댔다. 늦게 퇴근하면 탄천에서 사십분을 뛰었고, 더 늦게 퇴근하면 더글로리를 세시간 보고 늦게 잤다. 심박이 180 이상으로 올라가거나 박연진이 로얄 살루트 병으로 손명오 머리를 깨는 장면같은 걸 봐야 드디어 일에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어느 쪽이든 잠은 잘 못 잤다.
생활을 박살내가면서까지 일에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문제가 결국 끝이 나고 제품은 구림에서 멋진 상태로 이행하고 나는 더 성장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후자로 갈수록 대충 맞는데 전자가 몹시 틀려먹었다. 문제는 끝이 나지 않는다.
봄이 지나가고 가을이 다 왔는데도 참신하고 거대한 문제에 대가리가 깨지는 내 모습이 그 증거다. 제품이 커지면 그 스케일에 맞는 또 다른 골치아픈 문제가 생겨난다. 플랫폼을 고치면 의도대로 사용하지 않는 경우는 계속 나타난다. 뭘 해결하면 다른데가 터진다. 비즈니스는 확장될수록 복잡해진다.
이딴 도르마무 상황에서 업무 퍼포먼스는 어떻게 제고해야 하는가? 그냥 아캔두디스얼데이 해야한다. 끝없이 지속 가능한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 어제까지 인피니트 게임 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대의명분을 위해 노력하고 단기적 성과에 목매지 않고 끝없이 무한한 게임을 펼치는 비즈 니스가 크게 성공한다는게 골자다.
대의명분을 추구하는 여정에선 얼마나 성취했든 간에 여전히 갈 길이 멀게 느껴진다. 대의명분은 빙산과 같다. 우리 눈에는 빙산의 일각, 즉 이미 완수한 업적만 보인다.
여전히 갈길은 멀다. 어떤 문제든 어떻게든 끝나리라 생각하면 발 끝만 보고 있는 것일지도.
회사 동료가 "저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는데에 있어) 별 생각이 없습니다." 라는 취지의 말씀 하셨던 게 요새 종종 생각난다. 이게 지속 가능하게 문제를 푸는 사람의 참된 자세다.
일을 별 생각없이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짜피 문제는 끝이 없으니 아침에 양치를 하듯 별 생각 없이 문제에 뛰어들어야 한다. 이게 문제에 관해 느끼는 절망의 역치를 줄인다. 더 어려운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저게 요것보다는 좀 어렵넹 헿 오늘 점심 머먹지" 하면서 탁월하게 풀어제껴야한다.
그레이 아나토미 시즌 6에서 신경외과 의사인 데릭은 수술이 몹시 힘든 척수 종양 그림을 침대 위 벽에 그린다. 혈관과 신경 분포가 극악해 조금만 잘못 건들면 환자는 죽거나 불수가 되는 복잡한 종양이다. 데릭과 그레이는 서로의 눈이 닿는 곳에 어려운 문제를 두고, 종양 밑에서 머리를 맞대고 같이 고민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용기를 얻는다. 꽤나 의학 드라마 식으로 널디한데 또 사랑스러워서 묘한 매력이 있는 장면이다.
근데 이 장면의 진짜 알파는 저렇게 복잡한 문제를 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인 안방 침대 위에 붙여놓은 데릭의 내공이다. 그는 집에 저런 극악한 문제를 들여와 머리맡에 두어도 자식도 잘 키우고 문제는 개쩔게 풀어내서 환자를 살려낸다. 지금 고민하고 있는 앱 아키텍처 그림을 내 침대 머리맡에 붙여놓는다면 나는 아마 기꺼이 모든 절망을 약속하고 스스로 생활을 더욱 박살내는데 열심히일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