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 신화 읽기

이걸 자기개발서처럼 읽으면 안 된다
2026년 05월 05일 /
#thought#book

시지프 신화를 가장 쉽고 크게 오독하는 방법은 자기개발서처럼 읽는 것이다. 내가 반항에 관심을 가졌었던 이유는 『페스트』에 나오는 리외가 개멋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정말 안 될 것 같은 일을 묵묵히 해내며 거기서 보여지는 단단함이 멋있었다. 그래서 삶의 지침으로 삼을 수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시지프 신화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카뮈는 책의 첫머리에서 자기 글이 그런 종류가 아니라고 못박는다.

여기에서 독자는 다만 인간 정신이 앓고 있는 병에 대한 순수한 상태 그대로의 묘사만을 보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은 여기에 그 어떤 형이상학도, 그 어떤 믿음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 이것이 이 책의 한계이며 유일한 선택이다.

시지프 신화는 어떤 삶의 모범을 권하는 책이 아니다. 시지프는 "부조리의 감성"을 끝까지 따라간 자리에 남는 형상과도 같다. 따라야 할 본보기가 아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행복한 시지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라는 마지막 문장을 자기 좌우명으로 옮겨오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세계의 부조리를 지탱해나감으로써 맛 볼 수 있는 형이상학적 행복이란 것이 존재한다. 정복 혹은 연기, 무수한 사랑, 부조리한 반항 같은 것들은 인간이 미리부터 패배한 전장에서 자신의 존엄성에 바치는 경의인 것이다.

삶이란 미리부터 패배한 전장이다. 카뮈가 이 책에서 아주 조금만 말하는 행복이란 것은 일이 잘 풀리는 감각도, 힘든 일을 하지만 추후에 의미가 있다는 확신이 될 수 없다. 그 모든 불행을 약속하면서도, 부조리를 이해하면서도 그 삶을 포기하지 않는 상태다.

부조리한 것은 바로, 이 비합리와 명확함에 대한 미칠 것 같은 열망의 맞대면이다.

카뮈에게 부조리는 세계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 사이의 충돌이다. 인간은 의미와 설명을 원하는데 세계는 답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애초에 이런 사람은 멋지니까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책 내용이 생각보다 빡세지만 이걸 조금이라도 삶에 접목하고 내가 하는 일을 담담하고 열심히 할 수 있는 '교훈' 따위를 얻을 수는 없을까? - 는 생각 자체가 어떤 삶에서의 명확한 답을 상정하고 있다. 이 책을 잘 읽었을 때 그러한 답은 애초에 없다는 깨달음으로 발전해야한다.

반항은 인간과 그 자신의 어둠의 끊임없는 대면이다. 반항은 동경이 아니다. 반항에는 희망이 없다.

반항에는 희망이 없다. 위안이 될 만한 어떤 이야기도 들이지 않는 상태가 반항이다. 카뮈나 니체의 텍스트를 보면서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 롤모델은 있고 나는 그 경로로 단선적으로 발전하면 된다는 그 사실 자체로 위안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카뮈의 반항은 그 모든 위안을 도피이자 비약으로 분류한다. 자기개발서는 현재의 행복을 미루며 노력하는 것을 '투자' 라 부르고, 종교는 죽음을 '영생'이라 부른다. 누군가의 위로는 실패를 '지나고 보면 다 의미 있을 일'이라 부른다. 짓누르는 것에 다른 이름을 붙여 거룩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다 비약이다.

그래서 카뮈는 삶의 질보다 양을 말한다. 가능한 한 많이 의식하고 많이 경험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배우와 정복자가 부조리한 인간의 형상으로 등장하는 이유도 같다. 둘 다 운명에 복종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현재를 밀고 가는 사람들이다. 매우 괴롭게도.

이제 시지프를 생각해본다. 카뮈가 주목하는 것은 바위를 미는 장면이 아니라, 바위가 굴러 떨어진 뒤 다시 산 아래로 내려오는 그 순간이다. 그 순간 시지프는 자기 노동의 헛됨과,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를 안다.

시지프의 소리 없는 기쁨은 송두리째 여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삶의 소유권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소유권은 일반적인 자유나 행복을 뜻하지 않는다. 자기 삶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고 해서 삶이 더 나아지지 않는다. 더 무거워지고, 더 외로워질 수도 있다. 시지프는 그 떠안기를 한 번도 멈추지 않는 인간이다.

카뮈가 말하는 자유의 개념도 비슷하다. 말이 좀 웃긴데 우리가 자유라고 믿어온 것이 사실은 다른 형태의 속박이었음을 인정할 수 있는 자유임을 말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부조리의 인간은 자신이 지금까지 자유의 전제에 매인 채 그 환상을 먹으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그에게는 속박이었던 것이다. 자기 인생에 어떤 목표를 상정함으로써 그는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의 요청에 순응했고 그리하여 스스로 자유의 노예가 되었다.

좋은 가장, 좋은 직장인, 어떤 영역에서 잘 나가야 한다는 자기 규정이 우리를 그 이미지에 맞춰 살게 만든다. 자유라고 믿었던 자기 결정이 사실은 미래의 어떤 인간상을 위해 현재를 도구로 쓰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부조리한 삶 속에서 어떠한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 되는 것이고, 이는 다 쓸데가 없다.

부조리는 나에게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즉 내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부터 이것이 바로 나의 깊은 자유의 이유다.

자유란 들뜰 수 없는 것이다. 경제적 자유 같은게 아니다. 인간들이, 특히 한국에서 목적 지향적으로 살아왔다면, 거의 모든 동기가 카뮈가 말하는 자유의 반대편에 있다. 어떤 인간이 되겠다는 그림과 계획을 거두면 삶에 무엇이 남는가? 그 자리를 들여다보는 일은 즐겁지 않고 행복해지지도 않는다. 시지프의 삶은 결코 권할 만한 삶처럼 보이지 않는다. 자살도 종교를 통한 비약도 거부한 뒤에 남는 인간의 형상에 더 가깝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차라리 자살하거나 종교 믿는게 더 행복한 삶일 수 있다.

인간은 과연 구원을 호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 이 문제가 바로 나의 관심의 전부다.

산정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

시지프는 나에게 무척이나 위대해 보였고, 동시에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난 적당히 열심히 하면서 적당히 행복하게 살고 싶다. 인간 세계에서 최대한 답을 찾아 해매면서 내 쾌락을 증대하는 데 관심을 열심히 기울일 것이다.


Written by 김맥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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